AI 시대에도 대학 학위가 중요할까
실리콘밸리에서 달라진 채용 문법
“전공이 무엇입니까?” “전자공학입니다.” “그럼 실제 장비를 다뤄본 경험은 있습니까?”
예전 같으면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학점은 얼마인지가 먼저 나왔을 법합니다. 하지만 요즘 기업 담당자들의 질문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생산 장비를 다뤄봤는가.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가. Excel이나 Python을 사용할 수 있는가. 영어로 현장 엔지니어들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최근에는 여기에 새로운 질문이 하나 추가됐습니다.
“AI를 실제 업무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지난 30년 가까이 실리콘밸리를 취재하며 보아온 채용 풍경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기업들이 알고 싶은 것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어요.
“어디서 공부했는가”보다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명문대 졸업장이 성공의 티켓?
실리콘밸리는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대학 학벌의 힘이 가장 강했던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스탠퍼드와 UC 버클리를 비롯해 MIT, 카네기멜런 같은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전자공학을 공부한 젊은 인재들이 끊임없이 이곳으로 몰려왔습니다.
좋은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인텔, 구글, 애플, 메타 같은 기업으로 들어가는 길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실리콘밸리에서 수많은 엔지니어와 창업자들을 취재하면서 대학이 이 지역의 기술 생태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지켜봤습니다.
스탠퍼드는 단순한 대학이 아니었습니다. 교수의 연구실에서 나온 기술이 스타트업이 되고, 학생들이 회사를 만들고, 벤처캐피털이 돈을 투자하고, 성공한 창업자가 다시 대학과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생태계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그 오래된 공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졸업장은 있는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요즘 기업들의 채용 공고를 들여다보면 변화가 보입니다.
학위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학위 옆에 붙는 조건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Experience. Skills. Projects. Portfolio. 그리고 AI.
세계경제포럼(WEF)의 Future of Jobs Report 2025에서도 기업들의 채용 기준 변화가 드러납니다. 향후 인재를 평가할 때 81%가 업무 경험을 계속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고, 48%는 직접적인 기술 평가를 활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학 학위를 요구하겠다는 비율은 43%였습니다. 이 숫자는 대학이 필요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업이 더 이상 “대학 졸업장 하나만으로 능력을 추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면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디자이너라면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합니다. 데이터 분야라면 실제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엔지니어라면 장비와 공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제 거의 모든 분야에서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얼마나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지가 추가되고 있습니다.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넘쳐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제가 더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AI가 가장 먼저 흔드는 자리가 신입사원의 자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대학 졸업생이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부터 중요한 의사결정을 맡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조사했습니다. Excel 데이터를 정리했습니다. 회의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보고서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한 프로그램을 작성했습니다. 선배 엔지니어가 시키는 기초적인 분석을 했습니다.
그렇게 2년, 3년을 보내면서 경험을 쌓고 전문가가 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로 이 업무들이 생성형 AI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ChatGPT는 자료를 정리하고 보고서 초안을 만듭니다.
Copilot은 코드를 작성합니다.
AI 에이전트는 여러 자료를 검색하고 비교하고 분석합니다.
회사의 선배가 신입사원에게 맡기던 업무 일부를 이제 AI에게 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미국 노동시장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최근 대학 졸업자의 실업률은 약 5.7%였습니다. 더 눈에 띄는 숫자는 underemployment입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통상적으로 학사 학위를 요구하지 않는 직업에서 일하는 최근 졸업자의 비율이 41.5%에 달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를 보면 학사 학위 보유자의 평균적인 소득은 여전히 고졸자보다 높고 실업률은 낮습니다. 여기에 AI가 새로운 변수를 던지고 있습니다.
스탠퍼드 Digital Economy Lab 연구진이 미국의 급여 데이터를 분석했더니 AI 노출도가 높은 직종에서 22~25세 젊은 근로자들의 고용 증가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AI가 미국 청년 일자리를 없앴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업무를 보조하는 분야보다 기존 업무를 자동화할 가능성이 높은 직종에서 젊은 층이 더 큰 압박을 받고 있다는 연구 결과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실과 일터 사이에서 보이는 간격
AI에게 질문하려면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제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성급합니다.
오히려 AI를 사용해보면 반대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는 사람이 AI를 더 잘 사용합니다. AI에게 질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채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대학 교육의 새로운 가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학은 지식을 파는 곳에서 경험을 만드는 곳으로 변화되어 될 것입니다.
정보는 이제 너무 싸졌습니다. 질문 하나면 세계 최고의 지식에 가까운 답을 몇 초 만에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딪치고, 실패하고, 다시 해결해보는 경험은 ChatGPT가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실리콘밸리에서는 수많은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PC가 등장했고 인터넷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스마트폰이 등장했고 클라우드가 기업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지금 AI가 또 한 번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직업을 없앨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라진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바뀐 것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능력이었습니다.
대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AI가 대학을 없애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학, 과학, 공학, 인문학을 깊이 공부하는 과정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대학 졸업장만 들고 기업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시대는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실리콘밸리의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은 계속 나올 것입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습니까?” 그러나 진짜 면접은 그 다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무엇을 해봤습니까?” “어떤 문제를 해결해봤습니까? 그리고 AI 시대에는 마지막 질문 하나가 더 붙을 것입니다. “AI와 함께라면 당신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습니까?”
대학 학위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학위는 능력의 완성 증명서가 아니라 출발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AI 시대에 사라지는 것은 대학이 아닙니다.
졸업장 하나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시대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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