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의 숨겨진 고뇌
너드들의 요새에서 일어난 '신경다양성' 혁명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에서 백만장자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죠. 20대와 30대의 젊은 나이에 수천만, 수억 달러의 부를 거머쥔 천재들이 길거리에 즐비합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공의 그늘 뒤편, 기술 거두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의 가정에는 말못할 아픔과 고민이 깊게 자리 잡고 있어요.
바로 그들의 자녀 상당수가 자폐스펙트럼장애(ASD)나 ADHD, 난독증 같은 발달·신경학적 차이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드의 부락'에서 발견한 이상 징후
한 저널리스트가 전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 100여 명이 모인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오픈소스 프로그래밍 언어인 펄(Perl)의 개발자이자 언어학자 출신 천재 개발자 래리 월(Larry Wall)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가 자폐증을 앓는 딸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달 뒤, 인터넷 통신 규약 TCP/IP를 개척한 실리콘밸리 최고의 여성 기술자 주디 에스트린(Judy Estrin) 역시 자폐 범주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지능은 비상하지만 사회성은 다소 떨어지는 사람들을 일컫는 '너드(Nerd)'. 첨단 기술의 본산인 실리콘밸리가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 등 '너드들의 요새'가 되면서, 그들의 유전적·환경적 요인이 맞물려 자폐 스펙트럼 아이들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가설은 오랫동안 지역사회의 화두였습니다.
실제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학령기 아동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 비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 전국 평균 31명당 1명꼴에 달합니다. 진단 기술의 발달과 적극적인 검진 덕분에 캘리포니아와 실리콘밸리 지역은 그 비율이 미국 내에서도 단연 최상위권에 속하죠.
<사진 설명> 실리콘밸리 거부 자녀 상당수가 자폐스펙트럼장애(ASD)나 ADHD, 난독증 같은 발달·신경학적 차이를 겪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억만장자들의 기부와 생명의 신비 연구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실리콘밸리 부호들의 기부 지형도 바꿔놓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브레이크스루상(Breakthrough Prize)'을 제안한 러시아의 벤처투자자 유리 밀너를 비롯해 마크 저커버그와 프리실라 챈 부부,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23앤드미 창업자 앤 워지키 등은 매년 거액을 기부하며 기초과학과 신경과학 연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저커버그-챈 부부의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와 고(故) 폴 앨런의 생명과학 연구소 등에 투입된 수십억 달러의 기금은 소아암, 류머티즘관절염뿐만 아니라 자폐증과 신경계 질환을 포함한 700개 이상의 연구 프로젝트에 사용되며 의학적 한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괴짜라 불린 천재 그리고 '신경다양성'의 재발견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독보적 재능을 보여주지만, 그에게는 늘 '괴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전처 저스틴 머스크는 그에 대해 "엄청난 성공을 이룬 테크 스타이지만 보통 사람이 살아가기엔 다소 불편한 사람"이라며, 그의 파격적인 언행과 몰입도가 신경학적 독특함과 연관되어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는 방송(SNL)에 출연해 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자폐 스펙트럼의 일종)을 가지고 있다고 직접 밝히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바뀐 결정적 계기는 영화 <레인맨>이죠. 영화 개봉 전해만 해도 미 주요 신문에서 자폐증 관련 기사는 100건 미만에 불과했지만, 개봉 이듬해 4배 이상 폭증한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적 관심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지난 25년간 의학계가 해온 것보다 더 큰 대중적 계몽을 이뤄낸 셈이죠.
최근 뇌과학과 의학계에서는 자폐, 난독증, ADHD를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만 보지 않고, 인류 기술 진보에 이바지해 온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의 자연스러운 변이로 바라보는 시각이 확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혜적 복지를 넘어 '신경포용적(Neuroinclusive)' 생태계로
이러한 시각 변화를 가장 발 빠르게 사업 현장에 적용한 곳 역시 실리콘밸리와 글로벌 IT 기업들입니다.
세계적인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기업 SAP는 2013년부터 진행해 온 'Autism at Work(일터에서의 자폐증)'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자폐인들이 가진 독보적인 패턴 인식 능력, 집중력, 문제 해결 능력을 소프트웨어 테스팅과 품질 보증, 데이터 분석 업무에 적극 활용해 왔습니다.
더 나아가 20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SAP는 단순 자폐 채용을 넘어 ADHD, 난독증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신경포용 네트워크(Neuroinclusive Network)'로 사내 시스템을 완전히 확장했죠. 자폐인을 단순히 도우려는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신경다양성을 가진 인재들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회사의 혁신 경쟁력으로 삼는 전략입니다.
<사진 설명> SAP가 2013년 시작해 발전시켜 온 'Autism at Work' 프로그램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들이 가진 뛰어난 패턴 인식, 세밀한 주의력, 논리적 문제 해결 능력을 소프트웨어 QA,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등에 적용했습니다.
가정에 찾아온 아픔과 고민을 숨기지 않고 과학적 연구와 사회적 포용으로 승화시킨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상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이들의 자정 작용과 공동체 시스템이야말로, 실리콘밸리가 수십 년간 글로벌 첨단 산업의 본진 자리를 놓치지 않는 진짜 비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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