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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 존 스타인벡을 읽다

한 주민의 경고: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변하지 않은 자본과 권력의 속성



지난 30년 가까이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기술 혁신과 부의 창출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해 왔습니다. 

닷컴 버블의 부침부터 모바일 혁명, 그리고 인공지능(AI)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늘 내일을 먼저 사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유리 빌딩과 천문학적인 투자금 뒤편에서 취재 수첩을 채울 때마다,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소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1930년대 대공황 시절 캘리포니아의 비극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입니다. 세기와 산업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제가 현장에서 느끼는 실리콘밸리의 본질은 90년 전 스타인벡이 경고했던 자본과 기술의 냉혹함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21세기의 '위태로운 캠프'


마운틴뷰 지역은 구글 캠퍼스(Googleplex)가 자리잡은 곳이지요. 대표적인 부촌 팔로알토와로스알토스가 인근에 있어 주택가격이 다른 지역과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구글과 그리 멀지 않은 마운틴뷰의 크리산토 애비뉴(Crisanto Avenue) 도로변는 테크 기업의 번쩍이는 최신형 전기차들 사이로 낡고 빛바랜 중고 RV(캠핑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주차장이 아닙니다. 살인적인 베이 에어리어의 렌트비를 감당하지 못해 길거리로 밀려난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마지막 집'입니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에드가 로페즈(Edgar Lopez, 57세)씨의 이야기는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잔인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팔로알토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베테랑 노동자이자, 마운틴뷰에서만 30년 가까이 살아온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주거비 때문에 세 식구는 결국 석 달 전 중고 RV를 사서 거리로 나와야 했습니다.

"정말 최악입니다. 도저히 그 렌트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접이식 의자에 앉아 아내와 고등학생 딸이 RV 안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로페즈 씨가 씁쓸하게 뱉은 말입니다. 마운틴뷰 코스코 인근의 멤버십 헬스클럽에서 이른 아침 샤워와 운동으로 품위를 유지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도 몇몇도 RV 거주자들이죠. 

이 생생한 삶의 현장은 90년 전 소설 속 조드(Joad) 일가가 마주했던 캘리포니아의 처절한 생활상과 소름 돋도록 닮아 있습니다.




<사진 설명>마운틴뷰의 크리산토 애비뉴(Crisanto Avenue) 도로변는 테크 기업의 번쩍이는 최신형 전기차들 사이로 낡고 빛바랜 중고 RV(캠핑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후버빌(Hooverville)에서 테크빌(Tech-ville) 


《분노의 포도》에서 대공황과 대자본의 기계(트랙터)에 밀려 집을 잃은 이주민들은 캘리포니아 외곽에 종이상자와 천막을 엮어 '후버빌'이라 불리는 거대한 천막촌을 형성했습니다.

오늘날 마운틴뷰와 베이 에어리어 전역의 대로변을 메운 RV 행렬은 90년 전 후버빌의 21세기 디지털 버전입니다. 기술 자본이 만든 엄청난 격차가 사람들을 콘크리트 바닥과 바퀴 위로 내몰았고, 이들은 하루하루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낡은 허드슨 트럭과 중고 RV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전 재산이자 유일한 생존 수단은 고장 난 '낡은 트럭'이었습니다. 차가 멈추면 길바닥에서 굶어 죽어야 했기에, 그들은 매일 밤 기름값을 걱정하며 극도의 불안 속에 살았습니다.

지금 크리산토 애비뉴에 서 있는 중고 RV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의 현행 규정상 RV는 3일마다 차량을 이동해야 합니다. 운전면허가 없거나 운전을 못 하는 이웃들을 위해 로페즈 씨는 자신의 RV뿐만 아니라 이웃 다섯 가구의 차량을 대신 옮겨주며 연대의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다섯 명이나 딸린 가족에게 이 중고 RV 한 대는 직장을 잃지 않고 완전히 길바닥으로 나앉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생명선'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설명> 마운틴뷰에 주차된 자신의 캠핑카 계단에 앉아 있는 해리 엡스타인(72세). 그는 지난 15년 동안 이 거리에서 살아왔으며, 이 도시의 다른 많은 캠핑카 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게 되었다.



배척의 메시지


"부자들만을 위한 도시"

그러나 실리콘밸리가 이 가난한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비정합니다. 최근 마운틴뷰 시 의회는 주거 지역과 자전거 도로가 있는 거리에서 대형 차량(RV 및 캠퍼)의 주차를 전면 금지하는 조례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전거 안전과 사각지대 해소'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갈 곳 없는 RV 주민들을 공업 지역이나 보이지 않는 외곽으로 밀어내려는 '사실상의 축출령(De-facto ban)'입니다. 실리콘밸리 법률재단(Law Foundation of Silicon Valley)과 ACLU 등의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시 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이 조례가 보내는 메시지는 명백한 '배척'이다. 마운틴뷰는 모두에게 열린 곳이 아니며, 오직 부자들만을 위한 도시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소설 속에서 캘리포니아 지주들과 경찰이 이주민들을 '오키(Okies)'라고 비하하며 천막촌을 불태우고 도시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잔인한 격리 메커니즘이, 90년이 지난 지금 첨단 기술의 요람이라는 마운틴뷰에서 세련된 법과 규제의 옷을 입고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소음도 내지 않고, 사람들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왜 우리를 쫓아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페즈 씨의 이 허망한 질문에 실리콘밸리의 자본은 답하지 않습니다.

30여년 전 제가 처음 베이 에어리어에 발을 디뎠을 때, 테크 산업은 인류를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순수한 유토피아적 영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현장을 지키며 깨달은 것은, 기술이 아무리 화려하게 진화해도 그것을 움직이는 자본과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차가 매끄럽게 굴러가는 도로 옆에서, 당장 딸아이의 통학을 걱정하며 RV의 운전대를 잡는 한 노동자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대체하려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눈부신 혁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주는 달콤한 포도주에 취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마운틴뷰의 그늘에서 자라나고 있는 또 다른 '분노의 포도'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햇살이 실리콘밸리의 유리 빌딩을 비출 때, 저는 여전히 그 그늘에 가려진 인간의 존엄성을 먼저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제가 지난 30년간 이곳에서 펜을 들며 배운 가장 큰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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